비자금 조성·횡령 중심계좌로 밝혀져… (주)필코리아 지분 매입 등에 거액 유용

대검 중수부(박영수 검사장)는 9월 2일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이 영국내 금융조직인 BFC(British Finance Center) 자금 4771만달러로 (주)필코리아 지분 90%를 매입하는 등 모두 1141억원 상당을 유용한 혐의로 추가 기소했다. 길고 지루하던 김 전회장의 비자금 조성과 횡령 혐의에 대한 수사는 일단 이렇게 종결됐다. 예상했던 대로 추가로 밝혀진 혐의의 중심에는 BFC 계좌가 존재했다.

김 전 회장은 1983년 9월부터 2000년 1월까지 BFC자금을 조세회피지역인 케이먼군도에 설립한 페이퍼컴퍼니인 퍼시픽인터내셔널에 투자금 및 관리비로 4771만 달러를 송금하고 다시 이 돈으로 포천 아도니스 골프장, 경주힐튼호텔 등을 소유한 (주)필코리아의 지분 90%를 매입, 부인 정희자씨 등을 통해 관리했다는 것이 검찰의 발표내용이다.

그는 또 1999년 6월 (주)대우 미주법인의 자금 4430만 달러를 BFC를 통해 재미사업가 조풍언씨가 대표로 있는 홍콩소재 KMC계좌로 송금해 조씨로 하여금 이 돈을 국내로 송금, (주)대우정보시스템 주식 258만주와 (주)대우통신 TDX(전자교환기)사업 인수계약금으로 사용한 혐의도 받고 있다.

추가 혐의는 줄줄이 이어진다. 2000년 BFC 자금으로 구입한 전용비행기를 임의 처분한 1450만 달러를 횡령하고 1987년부터 1997년까지 역시 BFC자금으로 62회에 걸쳐 전시용 유화, 조각품 등 합계 628만달러 상당의 미술품을 구입한 사실도 밝혀냈다. 보스턴 캠브리지 주택구입 및 해외체류 경비 등으로 273만 달러를 임의 사용한 혐의도 드러났다.

검찰은 이번 수사를 통해 김 전회장 소유인 80만달러 상당의 미국 보스턴 주택과 (주)대우 영국법인이 설립한 페이퍼컴퍼니 메이볼 인베스트먼트 명의로 보유중인 290만달러 상당의 포도밭 59만평, 대우 워크아웃 이후 채권단에 신고되지 않은 비자금 400만달러를 각각 해외에서 보유중인 사실을 확인하고 관련내용을 예금보험공사와 자산관리공사, 대우그룹 채권단 등에 통보했다.

김 전회장측이 가장 민감하게 생각하는 대목은 페이퍼컴퍼니를 동원해 (주)필코리아의 지분 90%를 매입, 부인 정희자씨 등을 통해 관리해왔다는 내용이다. 변호인단은 “해외 지인의 투자 요청에 따른 매입이지 횡령이 아니다”라며 강력 반발하고 있다. 그러나 검찰은 이와 관련한 김 전회장의 해명은 설득력이 없고 검증하기 어려운 것으로 판단했다.

문제의 290만 달러짜리 포도밭은 프랑스 니스 인근 바르 지역 드라귀냥시 교외에 있는데 (주)대우 영국법인이 설립한 페이퍼컴퍼니 메이볼 인베스트먼트 소유로 돼 있다. 김 전회장은 검찰 수사 과정에서 이 포도밭이 대우자판 프랑스 법인이 자동차를 판매하고 받지 못한 미수금 대신 확보한 부동산이라고 주장했다.

BFC 성격 둘러싼 검찰과 대우의 충돌

이 농장에서 수확되는 포도는 질이 그리 좋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포도주를 생산하기는 하지만 병당 30프랑(4500원)에 팔리는 저가품이고 실제 포도주 맛도 신통치 않다는 것이다. 1997년 무렵 이 포도주는 ‘La Seigneurie’라는 브랜드로 국내에 수입돼 전국 백화점 등에서 시판되기도 했다.

김 전회장 측은 보스턴의 주택을 BFC 자금으로 구입했다는 기소 내용에 대해서는 억울함을 넘어 ‘기가 막히다’는 반응이다. 1990년 미국유학 중 교통사고로 사망한 아들 김선재씨를 위해 개인 재산으로 사들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검찰은 그 돈이 김 전회장의 개인재산이라는 점을 인정하지 않았다. 2000년부터 계속된 김우중 전 회장에 대한 검찰 수사는 대우가 런던에서 운영한 BFC 계좌에 초점을 두었다. 수사 초기 단계부터 검찰과 김 전 회장의 견해차는 하늘과 땅 사이만큼이나 벌어져 있었다. 검찰은 대우가 BFC 계좌를 활용해 최대 수조원대의 비자금을 조성했을 것으로 봤다.

김 전 회장측은 여기에 ‘비밀계좌’라는 말은 붙일 수 없다고 주장한다. 대우의 회사 코드를 써서 개설·운영한 계좌가 어떻게 비밀계좌가 될 수 있냐는 것이다.BFC는 1981년 런던에 설립한 해외금융 중계기지였다. 대우가 미수교국이던 리비아에 진출한 것이 BFC 설립의 직접적인 계기가 됐다. 창설요원은 5명, 공사대금 결제 등의 목적으로 지사 형태의 법인으로 출범했다. 이 팀의 리더는 이미 구속돼 검찰 수사진의 강도 높은 수사를 받은 바 있는 (주)대우 이상훈 전무. BFC팀은 현지 체이스맨해튼은행 등에 30여개의 계좌를 개설, ‘세계 경영’의 금융교두보 구실을 톡톡히 했다. 검찰도 BFC가 초기에는 당초 설립 목적대로 활용됐음을 인정하는 분위기였다.

BFC의 변질은 1995년부터, 더 심각하게는 1997년 IMF 위기가 닥치면서 급속하게 진전됐다는 것이 정설이다. 60억~70억달러에 달하는 해외차입금 독촉에 시달리던 김 전 회장은 기발한 편법을 동원, BFC계좌로 달러를 끌어모았다. 이때부터 BFC는 김 전 회장과 극히 제한된 몇몇 핵심을 제외하고는 입출금 내역을 알 수 없는 ‘비밀 금고’로 변질됐다.

검찰은 누적총액 200억달러 규모의 BFC자금 중 김 전회장이 사적으로 쓴 돈의 규모를 밝혀냈다. 김 전회장측은 그런 사용처는 인정하면서도 ‘개인 재산’ 일부가 계좌에 섞여 있었을 뿐 횡령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개인 재산을 왜 BFC에 넣어두었는지에 대해서는 명쾌한 해명이 없다.

BFC 운영의 비밀을 알고 있을 가능성이 큰 인물 중에 이동원 전 대우 UK 사장이 있다. 이상훈 전 전무와 함께 BFC 운영에 깊숙이 개입했던 인물이다. 두 사람은 당시 검찰조사 과정에서 “해외자산 운영은 김 전 회장이 총괄했기 때문에 비자금 액수나 은닉처는 알 수 없다”는 주장을 되풀이했다. 1997년 이후에는 중요 입출금 내역을 김 전 회장이 직접 챙겨 구체적인 용처를 알 수 없었다는 얘기다.

검찰은 그간 BFC 계좌 수사를 통해 75억달러 정도가 정부 승인절차 없이 입출금된 것을 확인했다. 그중 일부가 비자금으로 전용됐으리라는 것이 검찰이 주목하는 부분이다. 김 전 회장은 귀국 후 검찰 수사에서 그렇게 입출금된 돈은 ‘차입금 상환’ 등에 썼을 뿐 비자금은 아니었다는 주장을 되풀이했다.

대우가 200억달러의 BFC 자금을 조성한 방법은 크게 세 가지. 해외법인 명의로 현지에서 빌린 157억달러, 해외 현지법인들의 자동차 판매대금을 BFC로 직송해 조성한 14억1000만달러, 해외 유령회사로부터 물건을 수입한 뒤 수입대금을 빼돌려 26억달러를 조성했다.

BFC 계좌 자금 어떻게 쓰였나

검찰은 200억달러의 자금 중 김 전 회장이 이미 지출한 내역을 하나씩 소거해 가면서 김 전 회장의 비자금 규모를 수사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우선 1990년대 중반 이후 대우차 현지공장 10여 군데에는 BFC의 돈이 빠짐없이 투자됐다. 해외 생산법인 중 가장 큰 규모인 폴란드FSO, 기타 동유럽 국가, 인도와 우즈베키스탄의 자동차법인에 약 10억달러가 투자됐다. 전자, 중공업 투자와 관리운영에도 약 20억 달러가 소요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갚지 않을 수 없었던 해외차입금 157억달러와 투자액 30억달러를 합치면 187억달러다. 검찰은 김 전 회장이 만일 비자금을 조성했다면 200억 달러와 187억 달러의 차액 13억달러 범위일 가능성이 크다고 보고 수사력을 집중했다. 그중 상당부분이 차입금 이자 등으로 빠져나간 것으로 확인돼 당초 비자금 규모가 수조원이 넘을 것이라는 관측은 일단 과장된 것으로 판명됐다.

해외 부동산 소유 의혹 중 검찰이 전혀 손대지 못한 부분도 있다. 김 전회장이 1999년부터 2000까지 머물렀던 프랑스 니스의 150만 달러짜리 저택이다. 김 전회장측은 당시 이곳에 사는 친지를 방문, 2~3일간 지냈을 뿐이라고 해명했지만, 이곳은 김 전 회장의 초기 해외체류에 ‘베이스캠프’ 구실을 하던 곳이다. 대지 면적은 약 5000㎡(1500평). 수영장과 테니스코트가 딸린 집으로, 니스에서도 최고급 주택에 속한다. 지하 1층, 지상 2층으로 지어진 이 집의 외양은 프로방스 스타일로 중세의 성곽을 연상시킬 만큼 웅장하다.

프랑스 니스 법원이 발급한 등기부 등본에 의하면 이 집의 실제 소유주는 대우자동차 파리판매법인이다. 김 전 회장의 해외체류를 돕기 위해 구입했을 개연성이 크다. 현지 은행의 관리를 받고 있는 대우차 파리법인이 어떻게 이 집을 살 수 있었을까. 칼 같은 업무 집행으로 이름난 프랑스 은행이 채무를 잔뜩 진 회사가 150만달러짜리 집을 사는 것을 용인했을 리 만무다.

당시 대우자동차 파리법인은 이 집을 사기 위해 자본금 5만프랑(약 750만원)의 솔레이사를 세웠다. 주소지가 대우자판 파리법인 주소와 일치하는 점으로 미루어 솔레이는 실체가 없는 유령회사다. 등기부에는 부동산회사로 돼 있지만 대우자판 파리법인이 왜 법인 내에 부동산회사를 차렸는지 이해할 수 없다.

이와 같은 정황으로 판단하건대 대우자판 파리법인은 니스의 저택을 구입하기 위해 이 회사를 급조한 것이 틀림없다. 채권은행이 법인을 관리하는 상태에서 그들의 동의 없이 불요불급한 휴양지 저택을 산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솔레이가 설립된 날짜와 이 저택의 구입 날짜가 1999년 7월 20일로 일치하는 점도 이와 같은 의혹을 뒷받침한다.

솔레이 설립 당시의 대표이사는 대우차 파리법인 대표이사인 이근씨. 그는 파리법인의 부장급 간부인 김상만씨와 회사 주식 500주를 절반씩 나눠 갖고 있었다. 이상하게도 회사 설립과 동시에 이근·김상만씨는 알제리계 프랑스인 스마티 아메드에게 자신들이 가지고 있던 주식을 넘겼다. 솔레이의 대표이사를 이근씨에서 아메드로 바꾼 것이다. 그러나 등기부 등본상에는 실제 소유주가 대우자동차 파리법인이며 스마트 아메드는 이 집의 재산권을 행사하지 못한다는 규정이 명시돼 있다. 집을 소유한 것 말고는 아무런 영업활동도 하지 않는 유령회사를 만든 뒤 대표이사도 외국인으로 바꿔 흔적이 남지 않게 위장한 것이다.

정희자씨가 흘린 세 번의 눈물

김 전 회장측은 이 저택은 손님접대 등을 목적으로 구입한 것이라고 해명했다. 일종의 영빈관으로 파리법인의 공식 자산으로 잡혀 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당시 파리법인은 매년 적자를 기록하고 있었고 현지에서 차입한 부채 때문에 은행관리 상태에 있었다. 150만 달러짜리 영빈관을, 그것도 파리에서 수천㎞나 떨어진 곳에 마련할 이유나 여력이 없었다.

이 저택이 파리자판의 공식 자산으로 잡혀 있다는 주장도 사실과 다르다. 2000년 당시 파리법인을 담당했던 국내 해외 자판팀 L모 상무는 “파리법인이 소유한 니스 저택에 대해서는 아는 바 없으며 그 집이 파리법인의 자산 목록에 들어 있지 않았던 것은 분명하다”고 확인했다.

그렇다면 대우자판은 150만 달러에 달하는 돈을 어떤 계좌에서 빼내 지급했을까. 김 전 회장이 조성했다는 비자금 일부를 이 집의 구입에 사용했을 가능성은 없을까. 니스시청 등기소에서 등기부등본을 확인하고 당시 이근 파리법인 대표를 추궁하면 충분히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김 전회장측은 검찰이 수십년간 대기업 집단을 운영해온 기업가의 국가적 공로를 깡그리 무시하고 사소한 혐의에 집착한다며 불만을 표출하고 있다. BFC계좌에 섞여 있던 김 전회장 개인재산임을 입증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 안타깝다고도 했다.

역시 가장 큰 의혹은 조풍언씨의 홍콩법인 KMC에 보내진 4430만 달러의 성격. 이번에 밝히지 못한 당시 정관계 로비의 실상도 이 자금과 연결돼 있을 개연성이 크다. “실패한 로비에 불과했고 김 전회장은 로비로 어떠한 이득도 취하지 않았다”는 것이 익명을 요구한 한 측근의 주장이다. 로비가 있었지만 형사 책임을 지기에는 억울하다는 점을 암시하는 대목이다.

김 전 회장의 부인 정희자씨는 이번 수사 결과에 충격을 받고 지난 9월6일 뇌수술을 받았다. 필코리아 지분 90%의 매입자금이 BFC 계좌에서 빠져나갔다는 발표에 크게 상심했다는 것이다. 이 일로 정씨는 생애 세 번째 통한의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1990년 장남 선재씨가 사망했을 때, 1999년 애지중지하던 서울 힐튼호텔이 해외 기업에 매각됐을 때 그는 펑펑 눈물을 쏟았다. 실패한 기업인의 억울한 업보인가, 아니면 부도덕한 기업인에게 가해지는 사회적 응징인가. 김우중과 대우 몰락사의 진실 규명은 아직 갈 길이 멀다.

한기홍<객원기자> glutton4@naver.com

출처: 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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