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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공지능 영화가 매년 쏟아지는 이유

많은 씨네필들처럼, 저도 블레이드 러너의 팬입니다. 하지만 저는 감독이 편집한 버전 보다는 맨 처음 개봉했을 때의 인터내셔널 편집버전을 더 좋아합니다. 그 버전에서 주인공 데커드는 안드로이드인 레이첼을 데리고 도시를 떠나, 어딘가 저 멀리 알 수 없는 자연으로 탈주합니다. 그래서 저는 이영화가 인간성에 대한 희망과 낙관을 가지고 있는, 괜찮은, 좋은 영화라 생각했었습니다.

블레이드 러너는 미국에서는 1982년 개봉했으나 한국에서는 1993년 5월에 10년이 넘은 세월을 훌쩍 뛰어넘어 개봉했었습니다. 미국에서도 그다지 흥행이 되지 않았는데, 우리나라에서도 소리소문 없이 동시상영관으로 내려갔었다고 기억합니다,

그런데 이 영화는 지금의 멀티플렉스 영화관들에서 볼 수 있는 영화보다 훨씬 뛰어난 화질과 음향을 선사했습니다. 그 이유는, 이영화는 필름으로 촬영하고, 영화관에서도 아날로그 영사기로 상영한 영화였기 때문이라 생각되는데요. 바로 이런 레트로한 면이 이영화의 주제와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블레이드 러너에는 SF와는 동떨어진 배경들이 많이 등장합니다. 낡아 보이는 액자라든지, 실내 장식들, 오래된 미술양식들이 자주 등장하고 있습니 다.

이런 미장센들이 의도하는 것은 한마디 단어로 요약하자면 노스텔지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 영화는 기계와 인간의 다른 점을 경험과 기억에서 찾고 있습니다. 블레이드 러너인 데커드가 안드로이드를 판별해 내기 위해 뜬금없이 거북이 얘기를 꺼내자, 안드로이드가 당황하는 것과 같이, 인공지능의 경험과 기억은 인간처럼 세밀하고 모호한 주관적이며 정서적인 질감을 갖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관점이 영화에 설정으로 쓰이고 있습니다, 학술용어로는 감각질, 혹은 퀄리아고도 합니다.

이와 같은 설정은, 튜링테스트의 영화적 표현입니다. 튜링테스트를 이미테이션 게임이라고도 하는데, 현대 컴퓨터의 근본적 작동원리를 제안한 앨런튜링의 삶을다룬 영화의 타이틀 이기도합니다. 튜링은 40~50년대에 동양철학인 주역을 이용해 이진법으로 작동하는 컴퓨터를 만들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앨런튜링과 튜링테스트는, 컴퓨터는 결국 인공지능을 궁극적 목표로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1950년대에는, 마빈 민스키를 비롯한 인공지능학자들의 주도에 의해, 인지과학혁명이라는 거대한 지적 흐름이 형성되었습니다. 이 흐름의 중심적 논란중 하나는, 지금까지도 소동을 일으키고 있는, 바로 의식의 문제입니다. 이는 정신적 과정이 컴퓨터로, 의식이 뇌로, 마음이 물질로 환원될 수 있느냐는 문제이기도 합니다. 이 문제는 그리스 철학으로까지 소급되는 서양철학의 중심 문제입니다. 즉 심신문제, 심신이원론이라고 부르는 문제이죠.

존설이란 학자가 제안한 중국어방이라는 사고 실험이 있습니다. 의식논란에서 가장 유명한 지위를 최근까지도 차지하고 있습니다. 이 사고 실험은 리들리 스콧이 던지는 것과 같은 떡밥입니다. 최근 존설의 강연을 찾아보면  의식의 중요성을 내세우기 위해 중국어 방 실험을 내세운 건 아니었다는 걸 알게 됩니다. 확실히 존설은 의식이 있다거나 없다거나에 대해 중요하게 발언을 하지 않습니다. 존 썰은 최근에는 유물론 혹은 기계론에 가까운 해석을 가미한, 진화생물학적 연구방법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진화생물이 의식에 대해 연구를 하냐 마냐가 정해진 것은 아니지만 존설은 거의 유물론적으로 접근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튜링은 의식에 대해 어떤 입장이었을까요?  튜링 역시 의식에 대해서는 중요하다거나, 안중요하다거나 언급했던 것은 아니며, 단지 인공지능이 발전하면 인간이 그것을 사람과 구분을 못할 것이다란 철학적 명제를 던졌을 뿐입니다.

최근의 인지과학 철학자인 대니얼 데넷의 주장도 이들과 유사합니다. 대니얼 데넷은 퀄리아나, 의식 따위는, 사람들이 가진 착각이거나 일종의 마술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들의 주장은 얼핏 동양의 철학방식과 어떤 지점에서는 유사하게 보이는 면이 있지만, 근본적으로 많이 다릅니다. 동양적 사고방식으로는, 존설이나 데넷의 주장이란, 인간과 로봇은 다르고, 의식의 연구방법은 별도로 존재해야 함을 알 수 있게 하는 도구일 뿐입니다.

동양의 철학적 입장에서는, 컴퓨터가 발전을 해서, 그것이 신경망학습을 하고, 고차원적의 창발적인 추상들까지도 다룰 수 있다해도, 그것은 인간을 모사할 뿐이며, 인간에 의해 불어 넣어진 것 외에는 최초의 의도를 스스로 가질 수 없습니다. 또한 근본적으로, 인공지능은 인간이 다루는 어떤 대상을 표상하는 지적 시스템일 뿐입니다. 그에 비해 인간은, 대상이 없는 절대의 실체입니다.

헐리웃에는, 블레이드 러너 이외에도 스티븐스필버그의 A.I., I-Robot, Chappy, Her까지 다양한 영화들이 있습니다. 이 영화들이 다루는 주제는 조금씩 다른데, 인공지능을 도구로 해, 인간성의 위기를 다룬다던지, 관료주의를 비판한다든지 입니다.  그런데 해마다 쏟아져 나오며 끝도없이 재생산되는 인공지능 영화의 공통된 주제는, 결국 인간이란 무엇인가 입니다. 블레이드 러너의 안드로이드, 공각기동대의 소령, 에이아이의 데이빗, 모두 로봇이라기보다는, 인간에 가까운 모습을 보여주며, 철학적이고도 감성적인 질문을 관객에게 던집니다.

공각기동대의, 티비 시리즈 오프닝엔, 소령이 어린 시절 인형을 가지고 노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인형은 결국 로봇과 같습니다. 우리나라 어린이들은 전통적으로 인형을 갖고 놀진 않았죠. 인형 혹은 피규어나 로봇을 갖고 논다는 것은 서구문화입니다.

서구인들은 어려서부터 인형을통해 인간이란 무엇인가란 질문을 하게 됩니다, 이는 서구인들이 자아와 세계를 인식하는 방법과 그들의 의식의 구조를 보여줍니다.

서구인들은, 의식이 무엇이냐는 것에 대해 동양인보다 더 예민하게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동양철학은 전통적으로 의식이 무엇이냐에 대해 큰 질문을 던지진 않았습니다. 의식에 대해, 인간 존재에 대한 중요한 조건으로 보지 않았던 것입니다. 의식이 존재하느냐 아니냐는, 동양철학 관점에서는 장난스런 논란이며, 그다지 차원이 높지 않은 질문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헐리우드 인공지능 영화들은 기본적으로 공포를 다루고 있습니다. 로보캅에서처럼 로봇이 인간에게 위해를 가하는 것도 될수 있습니다. 기계가 사람들의 일거리를 뺏고, 이것은 결국 인간의 존엄성을 해친다는 우려를 나타낸 러다이트 운동이 20세기 초반에 있었습니다. 하지만 좀 더 근본적으로는, 이들 영화들은 심신이원론에 의한, 분리의 공포를 다루고 있습니다.

이 분리의 공포란, 영혼과 육체, 정신과 물질, 주관과 객관, 자아와 세계, 신과 인간, 중심과 주변, 순수와 타락, 선과 악, 인간과 비인간의 분리 등으로 전개됩니다. 즉 이들 영화는 영화를 보는 내내 서양인들에게는 무의식적으로 심신의 분리로 대표되는 이원론의 공포를 불러일으키도록 만듭니다.

스필버그의 AI는 (스탠리큐브릭의 의도에 의해) ‘2001년 스페이스 오딧세이’의 인공지능 컴퓨터 할(HAL)에서는 다루지 않았던, 인간적이며 감동적인 면모를 추가 했습니다. 때문에 이후의 인공지능과 로봇을 다룬 영화들도 감동이라는 유사한 전략을 취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감동들 보다는, 인공지능 영화가 가져야 할, 보다 근본적인 관점을 드러낸 영화들이 있습니다. 60년대 이후 미국을 중심으로 펼쳐졌던 뉴에이지 운동, 즉 명상, 도교, 불교 등 동양문화의 영향력이 70년대이후 나타난, 스필버그의 E.T., 조지루카스의 스타워즈입니다. 이들 영화들은 이원론을 벗어난 일원론, Non-Dualism, Mindfulness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이티에 관한 자세한 리뷰는 저의 영상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스필버그와 같은 세대인 스티브잡스는 그의 인터뷰에서 애플은 6,70년대의 시대적 공기인 히피 뉴에이지사상의 일관된 흐름을 이용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그들 세대는 부모세대가 만든 세상을 그대로 믿기 어려워 졌으며 일상의 이면에는 무엇인가가 있다 생각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스티브잡스는 젊은 시절 명상을 하고 인도를 여행했으며, 애플의 디자인은 일본 선종불교의 영향을 받은 스킨디나비안 디자인을 따르고 있습니다.

인공지능을 다루면서 심신일원론적인, Non-Dualism, Mindfulness를 정면에서 다룬 영화는 존재할까요? 한국의 옴니버스 영화인 인류종말보고서의 단편, 천상의 피조물에는, 박해일이 목소리 연기를 한 깨달음을 얻은 로봇이 나옵니다. 이 영화의 문제는, 인공지능이라는 고도의 기술과 기술철학, 그리고 깨달음이라는 어떤 현상에 대해, 너무나 급박한 환원주의를 적용하며 중요한 질문들 가볍게 훑고 지나가버리고 있는 것입니다. 한국에서 우리의 전통 사상과 철학들을 다룰 때 흔히 저지르는 잘못들을 반복하고 있죠.

그런 면에서 ‘로보트 태권 v(1976)은 인공지능의 다양한 주제들을 폭 넓게 다루면서도 몸과 마음의 철학을 잘 구현하고 있는 걸작이라고 생각합니다. 인공지능 영화가 다루어야 할 고차원적인 사상들을 다 담고 있습니다.

훈이는 태권브이와 함께 태권도라는 몸과 정신의 균형 잡힌 훈련을 통해 진화적 태도를 체화합니다. 태권브이와 훈은 일심동체 로써 인간의 몸 활동에 기반한 인공물(기계, 로봇)과 인간의 인지 발달이 함께 일어나는 인공지능의 구현을 보여 줍니다.

메리는 스스로 창발적인 진화를 거듭하는 과정에서 선한 마음을 발견하고 이타적 행위를 통한 진정한 인간성을 획득 합니다. 태권V는 몸과 마음의 문제에 대한 고차원의 예술적 성취입니다.

블레이드 러너가 걸작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설정은 바로 미래 도시에 내리고 있는 비입니다.

공각기동대는 블레이드 러너로부터 인간과 기계가 같을 수 있냐는 질문 이외에, 중요한 것을 빌려왔습니다. 일본의 고대어로 흐르는, 주제곡 위에 펼쳐지는, 홍콩 거리를 모티브로 한 도시의 몽타주 장면이 그것입니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느 거리. 뛰어가는 어린이들의 노란 우산, 빗물이 흘러내리는 사실적인 표현, 오래된 전단지가 덕지덕지 붙은 습기 찬 벽, 휘황한 네온사인과 빗방울이 만들어 내는 수만 가지의 광휘, 이런 것들(色)이 관객의 오감을 총동원시키고(受), 특이한 노스텔지어와 예술적 감흥으로써의 퀄리아를 경험(想)하게 합니다. 이 장면을 보는(行) 관객들은 인공지능이 인간의 시적 감흥과 같은 주관적 경험의 특이함을 갖거나, 그것을 알아서 만드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즉각적으로 알게(識) 됩니다.
https://youtu.be/ARTLckN9e7I

블레이드 러너 2049는 어떨까요? 이 영화의 감독 이름은 잘 들어 보지 못했지만 전작인 Arrival은 봤습니다. 이 영화는 언어학 등 인간의 지적 역사에 대해 다루며, 영화라는 언어에 대해서도 자각적으로 다루고 있지만, 서점에서 만나야 항 교과서 같은 느낌을 줬습니다. 깊은 지적 깨달음이 결여된, 흔한 이론들의 나열에 불과한 것이었습니다.  게다가 얼라이벌은 2000년대 이후 영화들의, 어딘지 모를 심심한 카메라 구도와 미장센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블레이드 러너 2049의 티져에서도 그 느낌은 마찬가지이군요. 정성껏 소품을 준비하기보다, 텅 빈 화면을 CG로 분칠하는 영화가 될까 두렵습니다. 블레이드 러너는 미장센이 가장 중요한 영화였는데 말이죠. 이 영화 감독이 환영받는 곳은 좌파 영화계 입니다.

그렇다면 블레이드 러너는 과연 명작이자 걸작일까요? 애매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는, ‘안드로이드는 전자양의 꿈을 꾸는가’라는, 원작소설이 지닌 깊이의 한계 때문입니다. 인간은 로봇과 같은가라는 앨런튜링의 질문, 그런 존엄을 얻을 만큼 인간은 잘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은, 1982년에도 이미 낡은 것이었습니다. 블레이드 러너는 공각기동대를 위한 좋은 레퍼런스를 제공했고, 공각기동대는 훌륭히 블레이드 러너를 갈취하기는 했습니다. 리들리 스콧은 그가 에이리언에서 던진 안드로이드 떡밥을 최근 ‘프로메테우스’와 ‘에일리언 커버넌트’에서 또 써먹기는 했으나, 인공지능과 과학기술에 대한 어떤 깊이 있는 경지를 열어 보여주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뤽 베송은 루시에서 일종의 깨달음에 의한 컴퓨터와 일체화된 인간을 보여주며, 물질과 지식, 인간과 기계에 대한 약간의 동양정신적인 숙고를 보여주기도 합니다. 이는 불교의 영향으로 만들었다고 감독들이 밝힌 매트릭스의 장면들을 연상시키게 합니다.

터미네이터는 공포와 희망을 적절히 뒤 섞었다고 볼수 있겠습니다. 터미네이터가 뛰어났던 점은, 공포를 전시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닌, 인공지능에 나쁜 의도를 부여하게 되는, 인간성의 보이지 않는 악한측면과, 그것에 대항하는 사람들의 착한 마음을 그려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단순히 인공지능을 뛰어넘어, 양자역과 대통일 이론등의 발전이 요구되는 시간여행을 포함하여, 광활하고 고차원적인 우주론 까지도 상상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즉 과학과 인간에 관한 종합적인 고찰이 녹아 들어가 있습니다. 소식에 따르면 제임스카메론과 아놀드가 터미네이터로 다시 복귀한다는데, 그들이 더 나은 것을 보여줄 수 있을까요?

저는,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일은, 이세돌 구단이 알파고를 무너뜨린 것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바둑에는 우주의 모든 입자의 수보다 많은 변화의 가능성이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어느 정도 정해진 패턴이 존재합니다. 알파고는 인류가 쌓아올린 패턴들을 연구했고, 무적에 가까왔습니다.

그러나 이세돌은, 일반적인 패턴들을 모두 앞선, 새로운 수를 선보였습니다. 알파고는 은퇴했지만, 이후 이세돌 혹은 또 다른 이세돌의 후예와 맞붙는다 해도 반드시 이긴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알파고도 결국 인간이 만든 것이기 때문이죠.

인공지능시대에 정말 중요한 것은, 인공지능이 끊임없이 모사해야만 하는, 인간의 고도한 정신문명입니다. 그런 고차원의 정신적 깊이를 지닌 더 재미있는 인공지능 영화를 만들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Juno

한국표준협회 경쟁력향상센터 수석전문위원 nahojun@sode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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