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비로움을 제거하는 절차로서의 과학

이문열의 소설들은 인간과 정치의 허탈함을 잘 그려냈다. 그가 너무 쉽게 어떤 정치 형태를 선택한 것은, 그것이 좌빨 종북이 아니라서 다행이지만, 한편으로 안타깝다. 이문열이 선사한 배신은 문학의 순례가 다 끝났다는 듯 삼국지 등 선배들의 고전을 개작한 것이었다. 그의 소설 ‘시인’의 김삿갓과는 달리 이문열은 홀로 고독하고 지고한 예술의 길로 나아가지 않았다. 그는 독자가 기대하는 문학과 문학가의 낭만을 거부했다. 하지만 그는 문학의 재료와 방법들을 들추어 일목요연하게 소개하는 과학을 성취했다.

음모론은 현상을 해석하는 데 있어, 이미 대중적으로 드러난 것 외에 잘 드러나지 않은 요소들을 적용한다, 나아가 거의 전혀 드러나지 않은 요소들 까지도 접근하려 노력한다. 이제 음모론을 전혀 드러나지 않은 것의 거의 전부인 불교적 관점으로 해석해 보자.

음모론의 취약한 이론적 근거

음모론은 시간을 바탕으로 사건을 설명하는 면에서 역사학과 닮은 꼴로 여겨질 수 있다. 하지만 음모론이  과거를 해석해 그것으로부터 추세라는 것을 만들어, 그것이 권력, 금권 등의 미래 지형에 적용된다는 가정을 하는 순간 역사학과 멀어진다.

순풍이 불어오는 어느 맑은 날, 세계 경제와 정치를 주무르는 사람들 5천 여명이 크루즈에 모였다. 그들은 음모론 극장의 배역들이었다. 바다를 건너던 그들은 폭풍을 만났고 일시에 빠져 죽었다, 그 순간 모든 음모론도 바다 밑으로 가라앉았다. 인류는 미래를 잃어 버렸다.

이론은 가장 현실적인 것이다. 이론을 만들어 낼 수 없는, 현상의 설명이란 현실과는 점점 멀어진다. 역사학자들은 원래 미래를 전망하지 않는다. 역사는 반복될 수 있지만 사건은 반복되지 않기 때문이다.

미래학이란 이런 예상치 못한 사건이 돌발하는 것의 위험을 피하고 안정된 전망을 추구한다. 음모론은 통계 등 미래학이 가진 과학적 설명 수준과 방법을 지니지 못했으며 공격받았다, 음모론은 신비로운 직관이나 정신적 경향을 추구하는 예언을 통해 살아 남았다. 이것들은 과학이 아니므로 대중을 현혹시킨다.

역(易)이나 천문 등에 근거한 동양의 예언이란 철학적 체계를 설명하는 일의 일환이며 이는 과학의 영역임을 분명히 하자. 미래를 전망한다는 점에서 역을 통계와 혼동할 수 있다. 역은 개별 사건들로부터 원리를 추출해 내는 상향적 방식을 다루지 않는다. 그들은 원리로부터의 하향적 설명만을 제공한다. 역은 경험과학으로 원리를 만든다. 이 경험은 쉽게 체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탄허대종사는 선의 원리에 의해 해석한 주역선해를 번역했으며 여기에 정역(正易)을 덧붙였다. 그의 예언들은 모두 깊은 명상의 차원에서 발현된 것이 역이라는 현상 수준의 필터를 통해 펼쳐진 것들이다.

삶의 무대로서의 시간

불교적 해석에 의하면 미래, 현재, 과거라는 시간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모든 것이 원인과 결과라는 연기의 법칙에 의해 우주는 순간적으로 깜빡이고 있다. 설일체유부는 미래, 과거, 현재에 걸쳐 일체법이 이미 존재하며 우리는 현재에서 테이프 레코더의 헤드가 테이프를 읽듯 그것을 경험한다고 설명한다. 이 관점은 시간에 스스로를 내던진 자가 일체법을 경험하는 방식을 설명한다.

즉 번뇌에 의해 타임라인에 올라선 자는 그 순간 끝없는 과거, 현재, 미래를 만들며, 끝 없는 일체법을 타임라인에 배치시킨다. 이제 그는 인연생기의 법칙에 따라 하나하나 테이프 위의 일체법들을 읽어들여 경험(僧)한다. 이 타임라인 트랙이란 죽음의 영역도 포함하기에 깨어나지 않는 한 뛰어 내릴 곳은 애초에 없다. 다시, 깨달은 이에게 과거, 미래, 현재란 없다.

미래 전망을 과거의 추세에 의존하는 것은 소 뒷걸을 치듯 어떤 현상을 미리 맞출 순 있지만, 원인과 결과에 근거해 다이나믹스의 발생을 과학적으로 연구하는 것이 아니므로, 돌발적 요소라 생각하는 것을 설명할 수 없다.

돌발적 요소라 함은 흔히 우연이나, 눈에 보이지 않는 세상의 법칙, 혹은 신의 뜻 같은 걸로 설명되곤 한다. 불교라는 경험의 과학은 우연이라는 요소를 철저히 배격하고 있다는 점에서 음모론과 유사하게 보일 수도 있다. 세상과 우주에 일어나는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도 원인 없는 결과란 없다는 것이 불교의 가르침이다. 하지만 그 원인이란 의도와는 다르다. 의도는 원인이 되지 못한다. 그것을 관찰하는 지성이 있는 한 모든 의도는 무력화된다.

과학 현상을 문화인류학적으로 바라보았을 때, 인간의 어떤 경향 중 하나인 ‘물리적 차원에서는 인과의 법칙을 적용하기 쉽다 여기고, 인간들 사이에 일어나는 일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존재한다. 서구 과학은 이 때문에 먼저 물리학 등을 발달시켰고 후일 경험적인 현대 심리학을 만들어 냈다.

인간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일의 원인을 찾아내기 어려운 이유에는 크게 두가지가 있다. 하나는 감추려는 의도가 들어간 것으로 그것이 원인으로 작용하는 일, 또 한가지는 낮은 설명 수준이다. 낮은 설명 수준이란 불교에서 말하는 유위법이다, 이는 쉽게 말해 현대 심리-행동학에서 다룰 수 있는 모든 복잡 다단한 인간사를 포함한다. 영성 등의 하위 정신적 경향을 포함한 신망상도 예외가 아니다.

감춰진 생명의 작동 방식

이것들과 달리 불교에서 드러난 세상을 움직이는 것은 무위법이다. 易은 음과 양의 변화의 원리로 세상을 파악하며, 이에 정통한 이른 바 도사들은 변화를 제어하기 위해 다가선다. 이는 결과의 원인을 제거하는 방식이 아닌 시간상의 위치한 사건의 발생을 오행 등으로 조작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불교의 무위법과는 달리 낮은 수준의 독자적인 정신물리학의 영역에 해당한다. 불교의 무위법이란 보다 근원적이며 광대한 미지의 차원을 다룬다. 쉽게 상상 할 수 있는 것 중 하나는 이 중생계에 드리워진 보살의 번뇌로서의 자비다. 불교의 무위법이란 표면적으로 이 세계에 생명을 살리는 것으로 나타난다. 유교에서는 이 생명을 살리는 표면적 행위로 도덕을 요구한다. 기술과 과학은 예술과 같이 생명의 도구다.

발명가의 노력의 근본적 목표는 생명을 구하는 것이다.
“An inventor’s endeavour is essentially lifesaving.”
Nicola Tesla

인간세에 도덕적인 정치 집단과 개인이란 표면적으로 없다. 생명을 살리는, 순수하고 착한 의도를 가진 사람들은 비교적 잘 드러나지 않는다. 대중정치와 국제정치의 무대에는 드러난 괴물들이 무대 위에 오른다. 유권자들은 최선이나 차선이 아니라면 차악이 최악보다 나은 선택을 강요 받는다. 이 전략적 문제풀이는 인류의 지성과 양심에 맡겨야 한다고 생각 할 수도 있다. 대중은 차라리 이상적인 요구보다는 보다는 실력이 있는 지도자가 있는가를 질문하곤 한다.

우파의, 혹은 중도우파스런 중도 좌파의 희망을 애매하게 구현하려던 박근혜는 싫든 좋든 실력이 모자란 지도자 중의 하나였다. 박근혜는 솜씨 좋게 일을 처리하지 못했다. 그런데 박근혜는 생명을 살리는 순수하고 착한 인물이었던가? 그의 개인 심성의 상태는 알 수 없다. 현대 세계에서 이른바 좌파라 불리는 인간들은 생명을 저해하는 일을 하는 것은 확실하기에 박근혜는 도움이 되기는 했다.

낡은 프레임의 제거

혹자는 유물론(에 근거한 공산주의(를 수정한 사회주의)))가 어떤 미시적 차원에서 생명에 도움이 된다고 강변할지 모른다. 예를 들어, 가령 어떤 사회주의자가, 자본주의 체제에서 일어나는, 그가 생각하기에, 피도 눈물도 없는 부자의 수탈 때문에 이제 막 굶어 죽어가고 있는 인민 동지에게 빵을 가져다 주었다면 이 사회주의자는 생명을 살린 것이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굶어 죽어가는 사람의 원인과는 별개로 사건을 두 가지 경우로 압축해 보자.

그 사회주의자의 빵을 가져다 주는 행위의 원인은 그의 사회주의 사상과는 상관 없이 일시적으로 인간 본연의 측은지심이 발동되었거나, 그 사회주의자는 원래 누가 죽건 말건 상관이 없는 냉혹한 자인데 마침 죽어 가는 자가 있기에 잘됐다고 하며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마음 속에 굳게 의도하며 빵을 가져다 주었던 것이다. 여기서 두 번째의 경우 그의 행동의 원인이 무엇이었건 생명을 살리는 선한 결과가 도출된다. 하지만 그 결과가 만든 원인으로 인해 그 사회주의자와 살아난 인민 동지는 결국 함께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실행하는데 영향을 미쳐, 이는 시스템 전체의 생명력의 발현을 저해시키는 결과(집단학살 혹은 경기침체)를 가져오므로, 그의 두 번째의 행위의 원인은 존재 하지 않는 것이 생명의 원리에 부합하는 것이 된다. 착한 독자는 두 번째 보다는 첫 번째가 좀 더 흔 할 것이라 생각할 수 도 있는데, 이 경우에도 사회주의자는 자신의 측은지심이 사회주의 사상과 관계가 있다고 생각하는 인지부조화를 일으키는 경우가 대부분이어서 결국 두 번째와 같은 잘못된 결과를 초래한다. 생명을 살리기 위해서는 사회주의, 공산주의, 유물론을 무너뜨려야 한다.

음모론은 예측이 아닌 탐사의 도구

현대의 좌우라는 정치 프레임은 자연스런 시대정신이라든가 공공의 정치의식 같은 허무맹랑한 것이 아닌 분명하고 실체를 가진 이익집단들의 손을 통해 관리된다. 음모론의 주장과도 같이 어떤 이들은 여러 프레임들에 동시에 손을 대기도 한다. 그 이유란 단순히 자신의 생존만을 위해 그런 게임에 뛰어든 것으로 이들을 불쌍한 중생이라 아니 할 수 없다. 중생을 살리기 위해서는 기존의 정치적 프레임에서 벗어나 새로운 프레임을 제시해야 한다. 이를 위해 일반적인 사람들이 기대고 있는 모든 것과는 다른 가치의 전환이 필요하다.

생명의 가치

인간의 삶에는 널리 드러난 매우 기본적인 현상이 있다. 그것은 물리적으로, 인간은, 다른 생명의 물리적 요소들을 섭취한다는 것이다. 인간들은 일반적으로 이 섭취를 개아적 차원에서 일어나는 행위로 잘못 판단하고 있다. 섭취란 모든 생명들이 한 번에 조건화된 작용으로 일어나는 현상이다. 때문에 물리적으로 인간은 독립된 존재가 아니며, 그 작용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마음에서도 우리는 독립된 행동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며, 생명과 삶의 차원에서도 마찬가지인 것이다.

생명을 중심에 두는 가치란 모든 잘못된 프레임들을 무력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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