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파이들의 배신과 모략을 다루는 데에는 그 만한 역사적인 배경이 존재하는 영국의 드라마와 영화 만한 게 없다. 2차 대전과 냉전 시절 이후 구소련의 이중 스파이들을 다룬 『케임브리지 스파이(Cambridge Spy)』 부터 같은 사건을 다룬 영화 『팅커 테일러 솔져 스파이(Tinker Tailor Soldier Spy)』, 영국의 첩보부 MI6가 주무대인 007 시리즈 까지 영국은 그들의 현대사를 그대로 드라마타이즈 했다. 대부분 실무에 종사하던 실제 요원들의 자서전과 회고록, 소설 등이 히트를 기록했다.

『팅커 테일러 솔져 스파이(Tinker Tailor Soldier Spy)』에서 시대상을 설명하는 결정적인 장면은 초반에 등장한다. 권력암투로 물갈이가 된 MI6내부에서 새로운 헤드쿼터들이 기밀 서류에 사인을 하는데 그 서류에 적힌 날자는 1973년 10월 이다. 1973년은 굵직한 세계사의 변동이 있던 해다. 영화는 삶이 너덜너덜해 진 스파이들의 일상과 그들 어떻게 조직을 장악하는 가에 촛점을 맞출 수도 있지만 세계사적인 안목으로 보면 50~70년대 초반 영국을 근거로한 MI6의 무용과 어떻게 그들이 실권을 CIA에 넘기게 되었나하는 쓸쓸하고 조금은 유쾌한 후일담이다.

산드라오가 주연을 맡은 BBC의 새로운 드라마 『킬링이브(Killing Eve)』는 영국 런던의 MI5라는 정보 기관과 그 주변(산드라 오와 동료들은 첫회에서 조직에서 쫒겨나 독자적인 팀을 만든다), 파리, 베를린, 모스크바 등 유럽의 스파이 세계를 주 무대로 하면서도 사이코패스 연쇄살인범이란 소재를 버무렸다. 냉전 시대를 지나 온 인간적인 퇴물정보원들과 때론 속을 알 수 없이 뱀 같이 배배 꼬인 내면을 가진 사악한 고위직들, 그들의 이후 세대인 산드라오, 또 그 이후의 밀레니엄 세대의 연쇄 살인범이 자아내는 세대간의 긴장과 갈등 혹은 그 통합의 분위기가 어렴풋이 드러나는 점에서 가족 드라마와 같은 인상을 주기도 한다.

산드라오의 의학 드라마 그레이 아나토미(Gray’s Anatomy)는 보지 않았지만 그녀가 영화 래빗홀(Rabbit Hole)에서 펼친 연기는 인상적이어서 훌륭한 배우라는 건 알고 있다. 그 영화에서 산드라오가 보여 준, 아이들이 죽은 부모들의 집단상담에서 만난 남자와 불륜을 하려다 현실을 자각하고 황망해 하는 순간의 연기는 매우 인상적이었다. 훌륭한 예술가들은 변화의 극적인 순간을 포착 해 관객에게 알려준다. 삶은 변화하는 것이라는 진리를.

많은 TV 배우들이 보통 미드의 성공 이후 영화로 커리어를 옮기기 우려우며 배역과 하나가 된 고정된 이미지를 갖고 소멸하는 것이 대부분 이지만, 산드라오는 그레이 아나토미의 탈을 벗고 훌륭히 변화에 성공했다. 산드라 오의 진중하며 지적으로 보이는 이미지는 연쇄살인범을 좆는 역에 최적이다.

시즌 1에서 이미 산드라오에게 그래미 여우주연상을 선사한 킬링이브의 원작은 필시 드라마 보다 훨씬 훌륭할 것이라 생각한다. 이유인 즉슨, 미드, 영드, 한드를 불문하고 극적이거나, 위트있게 보이려거나, 시청자에게 어줍잖은 지적인 만족을 주려 시도하는, 21세기 지구촌 TV 드라마들의 그 망할놈의 어색한 대사들에 나는 알러지와 경기를 일으키기 때문이다. 드라마 작가와 제작자들아 제발 좀, 현실에서 그런식으로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국내에도 책이 출간되었다. 출판사의 소개에 따르면 글쓴이인 루크 재닝스(Luke Jennings)는 영국 태생 작가이자 저널리스트로 소설 『애틀랜틱(Atlantic)』로 맨부커상 후보에, 회고록 『혈연(Blood Knots)』을 통해 사무엘존슨상과 윌리엄힐상 후보에 올랐다.

이 드라마에는 숨겨진 악의 세력 12사도(The 12)가 존재하는데, 이들은 세상을 흔들어 불안하게 만들기 위해 젊은 여자 사이코패스 살인범을 사주해 사회의 저명인사들을 연쇄살인한다. 사회를 근본부터 불안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이는 작금의 대한민국 좌빨 주사파 세력이 하는 짓들 내지 그 주변의 음모론적 풍광들과 훌륭히 겹쳐진다. 공산-사회주의는 언제나 사회를 불안하게 하고 악으로 물들인다. 때문에 전반적인 분위기와 설정은 우라사와 나오키의 『몬스터(Monster)』와 유사하다. 아마도 킬링이브는 몬스터의 세계에서 15년이 지난 현재 버전이랄 수 있다.

킬링이브는 시즌1에서 높은 시청률을 기록했다. 어색한 대사들과 함께 순간순간 발견되는 좀 민망한 연출이 있다. 하지만 참고 봐주는 수 밖에 없다. 비행기 표를 구입하지 않더라도 유럽전역의 현재의 생활풍경들을 보는 소소한 재미가 있다. 게다가 덱스터(DEXTER)와 멘탈리스트(The Mentaist) 이후 실로 오랫만에 정면으로 어둠을 들여다 보는 드라마가 아닌가.

이 드라마의 주인공들은 서로를 죽이려 하는 동시에 동성애스러운 모습을 보인다. 지적인 동양인 중년 여성 스파이와 인형같은 모습을 한 20대의 러시안 여자 연쇄살인범의 기괴한 동성애 코드는 이 드라마의 주요한 셀링 포인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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