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념과 인륜의 파괴

사람들은 말한다. 이념의 노예가 되면 가장 먼저 인륜이 무너진다고. 가족으로 하여금 서로에게 불리하게 행동하라고 하는 것이 그것이라고들 말한다. 이런 행태는 5호 감시제라든지하는 형태로 북한에서 잘 나타난다. 비록 부모에게 죄가 있다고 해도 자식은 부모를 감싸는 것이 옳다는 입장이 우파의 입장이다. 좌파는 인륜 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그렇다면 그것은 무엇이고 왜 그들은 그렇게 생각하는 것일까?

이념의 노예가 되면 가장 먼저 인륜이 땅에 떨어진다는 이유는 그것이 孝라는 인간성의 근본을 포함한 모든 뛰어난 동양의 마음의 계발을 제외 시키기 때문이다. 유물론은 로마 교황청의 스폰을 받아 고대 서구의 사이비 종교를 토대로 만들어졌다. 기독교는 유물론을 싫어하지 않냐고 물을 수 있다. 그들이 유물론에 반대하는 건 어떤 뛰어난 마음의 차원을 연구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神이라는 망상을 중심으로 한 사회를 확장시키고 사랑이란 소셜캐피털(정치)로 먹고 사는 삶을 유지시키기 위한 목적이다. 당연히 그 망상을 넓히기 위한 제국주의와 같은 폭력이 뒤 따른다. 둘의 공통적인 목표는 임진왜란을 필두로 동양과 동양 사상을 억제하고 파괴시키고 혼란하게 하며 사회를 분리시키고 지배하는 것이었다. 무지는 악을 행한다.

이념의 원인

흔히 말하는 이념이란 유물론, 역사적 유물론으로 부터 유래한다고 한다. 이념은 오늘날 몇 개국 안 남은 공산주의, 혹은 광범위한 사회주의, 주로 좌파와 진보가 그것을 갖는다고 얘기된다. 이념이란 간단히 말해 가난한 자들이 뭉쳐 부자의 자본을 없애거나 빼았는 것을 의미한다. 이 조건이 만족되려면 우선 부자와 가난한 자가 존재하고 그들 간의 차이가 발생해야 한다.

빈부의 차이는 하나의 양상으로 보이지만 사실 세가지 가지 양상으로 나타난다. 그중 하나는 절대빈곤이 비교적 많은 수로 존재하는 집단에서의 빈부차이다. 또 한가지는 절대빈곤은 드문 편이나 상대적 빈부의 차가 많이 존재하는 경우다. 상대적 빈부의 차는 곧 상대적 박탈감을 의미하며 이는 유물론으로 설명되지 않는 심리적 현상이다. 한편 수천년의 인류사에서 계속 시도된 농업혁명으로 절대빈곤은 지속적으로 감소해 왔다.

자본주의는 이념인가?

영어 표현에서는 자본주의(Capitalism)라 하며 자본주의 이념(Capital Ideology)라는 말을 쓰지 않는다. 일반적 어감으론, 비교적 부가 충분한 상태에서 그것을 인간성에 반하게 사용하는 상황을 가르킨다. 마르크스 엥겔스의 이론에서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이전 단계는 자연적인 상태다. 자연적인 상황에서 돈이란 축적되거나 유통이 정체 되는 일이 있으며 선하게도 악하게도 쓰인다. 자본주의를 이념화 하는 건 혁명 이념과 같은 인공적인 것이어야 하기에 부리는 억지다.

사실상 프로로레타리아 계급에 의한 혁명(폭력형명)이라는 특이한 행동 양식을 빼면 유물론은 헛소리다. 유물론은 인간성에 대한 편협한 사고를 기반으로 그것이 인간의 전부라며 억지 논리를 전개하고 있다. 즉 자신들의 이론을 위해 인간성을 희생 시킨다. 바로 이 때문에 이념의 노예가 되면 인륜이 무너진다.

인륜의 범위

좌파적 세계관은 도덕, 인륜 등은 자본과 그에 결탁한 권력을 위한 장치라 말한다. 근본적으로 인성교육 같은 것 까지 지배권력과 가부장적 세계를 위한 봉건적 장치라 말한다. 때문에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든지 하는 앞 뒤 안가리는 주장을 펼치기도 한다. 대체적으로 좌파들은 어떤 한쪽면이 극대된 세계관을 들이민 후 그것으로 정치질을 한다. 우리는 이런 싸구려 논쟁을 피하기 위해 인륜에 대해 확실히 해야 한다.  동물에게서도 발견되는 자식을 이끼고 부모를 이끼는 마음은 인륜을 넘어 천륜이다. 비록 자기 자식이 잘못했다 해도 그것을 감싸안아 주는 마음은 모성이며 역시 인륜이다.

은혜를 얻으면 보답하는 것이 인륜이고 이것이 효의 근본이다. 신의를 지키는 것은 도둑의 도리이기도 한데 역시 인륜이다. 인륜이란 인간에게서만 발견되는 것이 아닌 만물에 내재된 성질의 발현이다. 불교에서는 각각 견고, 습윤, 온난, 운동성을 본질로 하는 지수화풍 사대를 세계의 근본이라 말한다. 그것들은 물질을 보지(保持), 화섭(和攝), 성숙(成熟), 증장(增長)케 하는 모성과 연결된다. 우리는 현명하게 인륜을 보호하며 나쁜 의도의 도덕적 제도만을 혁파의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 스스로의 도덕적 기준을 요구할 수 있지만 부모에 대해서는 요구하지 않는 것이 정당하다.

빈부차가 문제가 되는 세가지 상황

인간에게 빈부의 차이는 불필요한 권력을 낳게 되는데 크게 세가지의 문제를 불러 온다.

첫번째, 비도덕적인 인간이 경제권력을 쥐는 경우 약한자를 갈취하거나 갖은 방법으로 괴롭힌다.
두번째, 비도덕적인 인간이 가난하고 권력이 없는 경우 가난하거나 부자인 모든 착한 이들을 괴롭힌다.
세번째, 빈자와 부자 모두가 비도덕적인 경우 서로에게 총질을 해대는 제3세계적 상황이 발생한다.

즉 모든 비도덕이 효율적으로 제어되면 그 나라는 행복과 경제발전을 이루기 쉬울 수 있다. 그러나 경제발전은 자원, 교육, 주변국과의 관계, 국민과 지도층 의지 등 여러가지 조건을 필요로 한다. 불교 국가인 부탄의 국민들과 지도자는 행복하지 않은 부자가 되는 것보다 행복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기도 한다.

불교에서 설명하는 번뇌 중 남의 탓을 하는 번뇌가 있다. 이 번뇌가 많은 이들은 빈곤한 것을 그 특징으로 한다. 상대적 빈곤감은 타인과 자신에 대한 평가의 갭의 원인을 남에게 전가하는 번뇌의 일종이다

상대적 빈곤감은 유물론에 근거

상대적 빈곤감은 마음과 물질을 둘로 보는 무지에 의해 역사상 언제 어디서나 발생한다. 즉 사후가 있는 영혼이나 중생의 인과유전을 설정하지 않는다면 자아는 현재의 불행을 부담시킬 곳이 없다. 다만 서구종교가 비물질적 요소를 주장하는 이유는 또 다른 무지를 지탱하기 위한 것이니 논의에서 제외하자. 하지만 맑스가 쓴 자본론은 교황청과 예수회의 지원하에 탄생했다는 걸 생각하면 카톨릭 신부를 멘토로 두고 있다는 누군가의 사상적 근거의 이유를 생각해 보게 된다.

참고로 임진왜란은 로마 교황청의 전폭적인 지지에 의해 일어난 사건이다.

불교에서는 가령 용모가 아름다운 사람에 대해 전생에 부처에게 꽃을 공양한 인연이라 여긴다. 용모에 대한 콤플렉스를 없애고 외모로 판단하는 부당한 세상을 헤쳐 나아가기 위한 성형수술은 필요하다. 하지만 그 모든 외부의 부당함이 없다면 현재에 대한 결과에 대해서는 자신이 책임져야 하는 부분이 존재한다. 외모보다 마음이 중요하다고 생각해 자신감을 갖는 많은 경우가 이에 해당한다.

도덕적 경제를 위해 필요 한 것

우리 사회는 한 때 ‘내 탓이오’라 하기도 했고 ‘부당함에 분노하라’는 주문에 혹하기도 했다.

이들 주장들에는 빠진 중요한 것이 것이 있다. 바로 스스로와 시스템에 관해  ‘도덕적이자’는 주장이다. 사실 ‘정의란 무엇인가?’ 와 같은 책이 100만 부나 팔리는 등 도덕에 관한 바람이 거세게 불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들은 우리의 역사로 부터 발굴한 도덕이 아닌 서구식 공리주의라는 수입된 도덕이었다. 그 출처 불명의 ‘공리’는 촛불 시위 등 결과적으로 우리 사회에 집단주의 정당화 교과서의 역할을 한 측면이 있다.

도덕성은 부패척결, 효율화, 개혁 등 여러번 추진되었으나 부패한 이익집단의 저항을 많이 받았다. 그 부패한 이익집단 중 하나는 적폐라는 말을 이용해 반대 이익집단을 공격하는데 집중한다. 그러나 그 쌓여진 폐해라는 북한식 공산주의 용어를 처음 유행시킨 자를 생각하면 아이러니하다.

박근혜는 최순실의 문제가 불거지자 직접 기자회견을 열어 잘못했다고 인정하며 사과 했는데, 한국 대통령제의 특성을 참작해 볼 때 그녀의 잘못이란 결국 사람을 잘 못 쓴 用人의 리더쉽 문제였다. 이를 둘러 싸고 일어난 일들은 모든 일이 그렇듯 역사가 다시 평가할 날이 있을 것으로 본다.

도덕적이자는 주문에는 부당하게 경제권력을 휘드르지 않겠다는 의지와 행동이 필요하다. 또한 상대적 빈곤감을 이유로 경제공동체에 뭔가를 요구하지 않겠다는 의지와 행동이 필요하다.

부를 증진시키지만 그 과실을 자신의 욕심만을 위해 사용하지 않겠다는 의지와 행동도 필요하다. 즉 자신을 위하면서도 국가와 사회를 위하는 자리이타적인 직업 정신과 기업가 정신이 필요하다

최저시급에 들어 갈 돈은 최빈곤층을 위한 것

우리는 최저시급 인상이 절대적 빈곤의 타파인지 상대적 빈곤감의 충족인지를 구분해야 한다. 최저시급 인상된 아르바이트로 모은 돈으로 해외 배낭 여행을 간다면 이는 정책 의도와 반대다. 아르바이트 고용주가 절대적 빈곤을 타파하고 있는 형편이라면 더더욱 그렇게 느껴질 것이다. 이렇게 되면 기업들은 인재등용시 해외여행 경험이 많은 지원자는 서류전형과 면접에서 제외시킬 것이다. 생계가 어려운 사회적 약자에 대해서는 최저시급 인상은 시급하지만 그 외는 사실상 필요 없다.

몰론 젊은이들은 헬조선을 외치겠지만 문제는 당장의 청년 빈곤 보다 더 시급한 게 있다. 지금 20대야 어차피 100세 이상 살텐데 연애와 결혼 좀 늦게 한다고 큰 문제 될 건 없다. 비싼 집 값 등 개인이 짊어진 사회적 부대비용을 해결하지 않고는 악순환이 될 가능성이 많다. 젊은이들은 학습과 창의적 노력으로 부를 창출 할 수 있는 기회와 시간과 방법이 많기 때문이다.  노인 등 사회적 약자를 제외한 근로자가 부딧치는 문제는 대부분 부도덕한 경제권력에 의한다. 우리는 약자를 보호함과 동시에 부도적해질 수 있는 여지를 감시하고 축소시켜 나아가야 한다. 결과적으로 부패 지수를 낮추는 것이 당장의 최저시급 인상보다 원인에 집중한 방안이다.

비정규직 정규화 보다 비정규직 임금 인상이 옳은 방향

비정규직을 정규직화 시키는 것은 사회적 약자의 낮은 최저시급을 해결해 주지 못한다. 비정규직의 임금을 정규직에 준해 지급하도록 하는 것이 부당한 경제권력 문제를 해결한다. 각종 수당, 상여비, 보험금을 모두 포함한 계산한 임금을 비정규직에 지급하는 것이 좋다. 경쟁력이 약해 비정규직을 원하지 않는 사람들의 정규직 전환 비율은 자연히 늘어나게 되며, 기업은 경쟁력 있는 비정규직자에게 원하는 성과를 얻을 수 있고 정규직 전환 부담을 줄일 수 있다.

지식산업화를 통한 부의 창출과 분배

거리를 가득 채운 요식업과 프랜차이즈는 지식산업화가 이루어지지 못한 대표적인 사례다. 서비스산업과 지식산업화를 통해 근로자의 전문화가 이루어질수록 경제는 발전한다. 전문화와 경제발전을 통해 근로자의 임금은 전반적으로 높아질 수 밖에 업게 된다. 서비스산업과 지식산업에는 사실상 단체협상 서비스를 제공하는 노동조합업이 포함된다. 단 한국에서 보통의 노동조합은 계급투쟁론을 그들의 철학적 근거로 하고 있다. 나쁜 부자들의 횡포를 제거하는 노력은 정당하며 우리가 힘을 합해 물리쳐야 하는 것이다. 한편 그런 예는 대표적으로 힐러리와 작당해 돈을 긁어 모은 자본가들에도 해당한다. 한국에도 좌파적 사상을 전하며 자신은 주식 부자라는 사람들에 대한 비판이 존재한다.

이념이란 망상에 대한 해법

붇다는 자본이 나쁘다고 한 적이 없으며 붓다와 동등한 위의를 가진 유마거사는 대부호였다. 재가 신도에게는 부도덕하지 않은 방법으로 가능한 부를 늘리는 것이 좋은 방향이라 했다. 상인, 여자, 창녀 등 신분, 성별, 빈부에 상관 없이 삶을 개혁하고자 불교라는 가치를 함께 만들었다.

엄밀히 진리의 체현을 저해하는 요인이 아닌 것들의 모습이 무엇이든 진리와 상관 없는 것이었다. 붇다는 인간 개개인이 스스로 자유의지를 획득하는 것을 가르쳤다. 공리주의, 공산주의, 사회주의 까지 근본적으로 자유의지와 관계 없고 오히려 그것을 저해시킨다. 이것들은 대부분 기독교의 비호 아래 대중적 무지를 연장 시키고 신에 대한 믿음이라는 우매함으로 돈을 벌기 위한 만들어진 사기이기 때문이다.

그림 출처: J. 데리다와 G. 들뢰즈의 ‘差異’의 논리와 中道 思想 – 박치완 (한국외국어대학교 철학과)

혹자는 중도와 중용을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중간 길을 가라는 것으로 오인한다. 자본주의라 불리는 경제 현상은 이념이 아닌 인간의 선과 악의 의지에 의한 판단 할 수 없는 결과의 상태다. 그것에 이념이나 계급 등을 부차적으로 인식하는 것은 감정적 번뇌와 도덕적 번뇌를 구분하지 못하는 행태로 나타난다. 중도와 중용의 의미는 좁게는 수행상에서 몸과 마음의 긴장과 이완의 치우침이 없음을 의미하며 같음과 다름, 존재와 무, 논리와 비논리 등 모든 이원론을 상위 차원의 연기의 법칙으로 잠재우는 것이다.

어떤 특이한 주장을 강하고 선명하게 밀고 나가는 것이 ‘주체’적이라거나 – 주체란 말은 불교의 체상용(體相用)이 하나인 일심사상 등에서 유물론적 입장인 體만을 따 온 것이다 – 다양함이 하모니를 이루는 게 옳다는 주장은 붇다 가르침에 대한 근본적 착각이다.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중도란 없다. 사회주의의 근본인 자본론이 거짓이자 자본주의라 불리는 현상만 있기 때문이다. 이념이란 일체개고를 직시하며 그것을 창의적으로 혁신하려는 마음의 상태와 함께 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념은 서구철학의 한계가 만든 환상의 탈주이며 메타적인 정신병이다. 단지 자신들이 외치는 것이 중요하다는 거짓 선동가들만이 나쁜 부자들과 손에 손잡고 존재할 뿐이다. 불교를 알게 될 수록 뇌내망상인 이념을 버리게 되며 인간 내면 발전의 조건에 대해 더 잘 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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