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적 입장에서 이 둘에 대해서 말하자면 수잔(Susan Blackmore)은 초선의 수행과를 즐기는 경지에 머물러 있으며, 피터슨(Jordan Peterson)은 똥 막대기를 버리지 못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둘 다 깊은 차원에는 들지 못했다.

마투나라(Humberto Maturana ) 혹은 바렐라(Francisco Varela ) 혹은 본 포레스터(Heinz von Foerster)가 이들과 얘기를 했다면 좀 더 흥미롭지 않았을까 싶다.

음모론적으로 얘기하면 피터슨이 경계하는 공산주의를 만들어 낸 예수회가 프로이드를 동시에 스폰했고 불교의 유식을 가져다 무의식 등을 정리하긴 했다. 융은 도교적 접근을 시도했으나 깊은 차원에는 다다르지 못했다.

기독교가 나름 현대적 주체(이것도 주체사상스런 이상한 한국적 조어이지만)를 형성하려 애 쓰지만 대부분 신망상을 만들어 내고 있으며 그것이 인간 삶을 공산주의만큼 병들게 하고 있다는 건 과학이다. 한국의 기독교가 긍휼한 역할을 한 측면이 있고 천부경 등을 깊게 연구해 사상의 중심으로 삼은 다석 유영모 같은 기독교인이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건 드문 예이고 보통의 삶에서 피터슨이 말하는 죽은 신을 다시 살려내야 할만한 역할이 있는 것은 아니다. 현대 사회에서 대다수 기독교인들은 아직 중세에 살고 있다.

수잔은 대상이 없는 절대를 얘기하고 있으나 아직 절대와 합일 되지 못했으며, 피터슨은 힘들게 절대를 끌어 당기고 있으나 체화되지 않았고 그것에 집착하고 있는 수준. 서양 애들아 열심히들 해 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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