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설(Husserl)은 그 무엇으로도 결코 경험의 과학이 될 수 없는 의식 수준의 미로에서 헤매었다. 현상학은 불교와 접점을 찾으려 노력했지만 결국 실패했고 과학이 되지 못했다. 우리나라에는 최근 현상학적 패셔너블을 차용한 불교스런 조류가 유행했다. 이들은 전반적으로 어떤 관능을 전시한다. 불교 수행자는 어느 수준 이상에서 행복, 자분지족이 불교 수행의 목적과 상관이 없는 것이라는 걸 알게 되는 때가 존재한다. 현상학적 경향에 대해 바렐라의 해석을 빌리자면 이는 잠꼬대이며 불교 수행이 목적으로 하는 것의 문 밖의 이야기다. ‘아예 이 문안으로 들어오지 못한다면’, ‘뜰 앞 잣나무의 소식’을 알지 못한다. 현상학에 관한 바렐라의 이야기를 The Embodied Mind를 통해 들어보자.

THE DEPARTING GROUND

1. A Fundamental Circularity: In the Mind of the Reflective Scientist

An Already-Given Condition

A phenomenologically inclined cognitive scientist reflecting on the origins of cognition might reason thus: Minds awaken in a world. We did not design our world. We simply found ourselves with it; we awoke both to ourselves and to the world we inhabit. We come to reflect on that world as we grow and live. We reflect on a world that is not made, but found, and yet it is also our structure that enables us to reflect upon this world. Thus in reflection we find ourselves in a circle: we are in a world that seems to be there before reflection begins, but that world is not separate from us.

For the French philosopher Maurice Merleau-Ponty, the recognition of this circle opened up a space between self and world, between the inner and the outer. This space was not a gulf or divide; it embraced the distinction between self and world, and yet provided the continuity between them. Its openness revealed a middle way, an entredeux. In the preface to his Phenomenology of Perception, Merleau-Ponty wrote, When I begin to reflect, my reflection bears upon an unreflective experience, moreover my reflection cannot be unaware of itself as an event, and so it appears to itself in the light of a truly creative act, of a changed structure of consciousness, and yet it has to recognize, as having priority over its own operations, the world which is given to the subject because the subject is given to himself…. Perception is not a science of the world, it is not even an act, a deliberate taking up of a position; it is the background from which all acts stand out, and is presupposed by them: The world is not an object such that I have in my possession the law of its making; it is the natural setting of, and field for, all my thoughts and all my explicit perceptions.

And toward the end of the book, he wrote, The world is inseparable from the subject, but from a subject which is nothing but a project of the world, and the subject is inseparable from the world, but from a world which the subject itself projects.

Science (and philosophy for that matter) has chosen largely to ignore what might lie in such an entre-deux or middle way. Indeed, Merleau-Ponty could be held partly responsible, for in his Phenomenology at least, he saw science as primarily unreflective; he argued that it naively presupposed mind and consciousness. Indeed, this is one of the extreme stances science can take. The observor that a nineteenth-century physicist had in mind is often pictured as a disembodied eye looking objectively at the play of phenomena. Or to change metaphors, such an observor could be imagined as a cognizing agent who is parachuted onto the earth as an unknown, objective reality to be charted. Critiques of such a position, however, can easily go to the opposite extreme. The indeterminacy principle in quantum mechanics, for example, is often used to espouse a kind of subjectivism in which the mind on its own “constructs” the world. But when we turn back upon ourselves to make our own cognition our scientific theme-which is precisely what the new science of cognition purports to do-neither of these positions (the assumption of a disembodied observor or of a dis-worlded mind) is at all adequate.

We will return to a discussion of this point shortly. At the moment, we wish to speak more precisely about this science that has come to take such a turn. What is this new branch of science?

위의 단락에 대한 한글 해석

The Embodied Mind는 국내에는 석봉래(Alvernia University 철학과 교수)에 의해 ‘인지과학의 철학적 이해’라는 제목으로 한국어 번역(1997)되었고 이후 ‘몸의 인지과학’이라는 이름으로 출판사를 바꾸어 재 출판(2013) 되었다. 이 번역서는 원저자들의 가장 날카롭고 논쟁적인 분별을 지나치게 부드럽게 윤문한 느낌을 준다. 바렐라가 마투라나와 한 이전의 작업에서도, 그들은 일부러 랩에 가까운 덜거덕 거리는 영어를 구사했으며 이는 편집자를 곤혹스럽게 했음을 기억하자. 중요한 몇 개 단어의 오역과 생략은 책을 희미하게 만든다. 풍부해야 할 행간의 상상력이 저해되는 것은 영어와 한국어의 차이 때문만은 아니다. 출판사의 마케팅과 더불어 이 모든 효과들은 원저자들의 의도를 멀리 떠나 이 책의 지위를 과학 프레임의 거대한 이동을 모색하는 전도적 선언서에서 한국 도서 시장에 유행하는 불교-과학 인문서로 추락시킬 수 있다. 이와 같은 위험을 방지하고자 다음의 해석을 제공한다.

다음 과학으로 떠나기 위한 곳

1. 근본적 순환: 반영[1]을 다루는 과학자의 마음속

선험적 상태

근원에 대한 인지에서 현상학방법론적으로 구부러진 인지과학자의 반영이란 다음과 같은 논리를 가질 것이다: 마음은 세계에서 깨어난다. 우리는 우리의 세계를 만들지 않았다. 우리는 단순히 세계와 함께 우리를 발견한다: 우리는 우리가 나이 들며 살아감에 따라 그 세계를 반영하기 위해 이곳에 왔다. 우리는 만들어진 세계를 반영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발견한다, 그리고 그것이 또한 우리의 구조로써 우리가 이 세계 위에 반영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반영 안에서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순환 안에서 발견한다: 우리는 반영이 시작되기 전에 여기에 있던 것 같은 세계 안에 있다, 그러나 그 세계는 우리와 분리되어 있지 않다.

프랑스 철학자 메를로 퐁티에 있어서, 이 순환의 인식은 자아와 세계 사이의, 내부와 외부의 간극을 열어 젖힌 것이었다. 그 간극이란 격차나 분리가 아니었다; 그것은 자아와 세계를 감싸 안은 것이었다, 게다가 그것들 사이의 연속성을 제공했다. 그것의 개방성은 중간 길을 드러냈다, enterdeux[2]. 그의 <지각의 현상학> 서문에서, 메를로 퐁티는 썼다, 내가 반영을 시작할 때, 나의 반영은 반영되지 않은 경험을 품고 있다, 더 나아가 나의 반영은 스스로를 하나의 사건으로 알아차리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그것은 참으로 창조적인 행위라는 면으로, 의식의 바뀌어진 구조로, 게다가 인식되어져야만 하는 것으로, 그것의 스스로의 작용에 우선권을 가진 것처럼, 그 세계는 주관성이 그에게 주어져서…주관성이 주어진 듯 스스로에게 나타난다. 지각은 세계의 과학이 아니다, 그것은 연극도 아니다, 위치하기 위한 필사적 점유다; 그것은 연극들이 성립하는 배경이다, 그리고 그것들에 미리 제안된 것이다: 세계는 그것의 주조 법에 따라 내가 포착해 가질 수 있는 物이 아니다; 그것은 모든 나의 생각과 나의 외현적 지각의 자연의 마련, 그리고 장이다.

그리고 책의 마지막을 향해가며, 그는 썼다. “세계는 주관과 분리할 수 없다, 그러나 세계의 투사에 다름아닌 한 주관으로부터, 그리고 그 주관은 세계와 분리될 수 없다. 그러나 그 주관 자체가 투영하는 세계로부터.”

과학이란 (그리고 그 사태를 향한 철학이란) 그런 중간 지대나 중간 길을 크게 무시하기 위해 선택된 것이다. 실로, 메를로 퐁티는 부분적으로나마 책임을 질 수 있었다, 최소한 그의 현상학적 방법론의 내부를 향해서는, 그는 과학을 기본적으로 非반영적이라 보았다; 그는 과학이 정신과 의식을 연약하게 상정한다고 주장했다. 실로, 이건 과학이 취할 수 있는 입장의 최대치들 중 하나다. 19세기 물리학자가 마음에 품었을 구경꾼이란 종종 체화되지 않은 눈으로 현상이 노는 것을 객관적으로 들여다 보는 것으로 그려졌다. 혹은 은유를 바꾸기 위해, 그런 구경꾼이란 인지하는 대행자로써 아무것도 모른 채 낙하산을 타고 지구에 내린 것으로 상상할 수도 있다, 객관적 실재를 차트에 그리기 위해. 그런 입장의 비평가는, 아무튼, 반대편의 극단으로 쉽게 이동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양자 역학의 불확정성의 원리로, 그건 종종 세계의 창조자로서의 주관주의로 비유된다. 그러나 우리 자신의 인지를 우리의 과학적 주제로 만들기 위해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로 선회하는 경우는-엄밀히 보아 이들 입장(체화되지 않은 구경꾼[3] 혹은 이 세계의 것이 아닌 마음)이 모두 아닌 것을 주장하는 것이 충분하다고 억지를 부리는 도저한 인지의 새로운 과학이다.

우리는 곧 이 논의로 돌아 올 것이다. 그 시점에서, 우리는 그와 같은 선회에 다다른 이 과학에 대해 더 정확히 말할 수 있기를 바란다.과학의 이 새로운 가지는 무엇인가?

[1] Reflection을 反省이라 번역할 수도 있지만, 그럴 경우 ‘동양적 관점으로서의 실천적 주관’을 배제한, 그리스 철학을 서구적으로 해석한, 물리적 구현으로서의 질료가 IDEA라는 빛을 Re(다시, 부차적으로) Flect (反射한다)는 천연적 알고리즘, 자동적이며 기계적인 느낌의 形而上學과는 다른 의미가 된다. 이 책의 저자들의 주장은 그러한 단순한 중심 없는 反影이 아닌, 反省 혹은 反性을 향한다. 그러므로 Part I의 Reflection은 모두 반영으로 번역해야 정확하다. 한편 서구 철학이 그리스 철학을 잘 해석했는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소크라테스를 제대로 이해했는지에 대해 이 책의 저자들의 관점을 빌린 별도의 연구가 필요하다.

[2] 네덜란드어 ([복수형]-s) [의복]피륙의 도중에 끼우는 긴 레이스나 자수

[3] 심리철학자들이 흔히 말하는 좀비와 같은 개념이다.
A philosophical zombie or p-zombie in the philosophy of mind and perception is a hypothetical being that is indistinguishable from a normal human being except in that it lacks conscious experience, qualia, or sentience.[1] For example, a philosophical zombie could be poked with a sharp object, and not feel any pain sensation, but yet, behave exactly as if it does feel pain (it may say “ouch” and recoil from the stimulus, or say that it is in intense pain). – 출처: 위키피디아의 philosophical zombie 항목

더불어 책의 핵심 문장 중 하나에 대한 해석을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In particular, the practices involved in the development of mindfulness/awareness are virtually never described as the training of meditative virtuosity (and certainly not as the development of a higher, more evolved spirituality) but rather as the letting go of habits of mindlessness, as an unlearning rather than a learning.

분별하건데, 텅빈마음으로 바라보며/알아챔(止觀)을 개발하는 데 관련한 수행이란 사실상 명상스러운 격조(게다가 어떤 높으신, 더 진화된 영성의 개발이랄 것이 분명히 아닌 것이다)로 설명된 바가 절대 없었으며, 오히려 그런 마음의 정처없는 습관을 놓아버리는 것이고, 학습이 아닌 비학습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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