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교가 설명하는 인간 본성 중 측은지심이란 단순히 대상을 불쌍하게 여긴다는 정서와는 좀 다른 결을 갖는다. 측은지심을 포함한 사단(四端)은 일곱가지 정서의 단서가 된다. 사단은 불교가 설명하는 생명의 원리에 가깝개 다가간다.

불교 수행자는 이성적 판단인 지혜가 무르익는 순간 假我들이 벌이는 무대 위의 소동인 인간 삶의 기본 구조를 이성적으로 이해하게 되는데, 이 때 일체 중생들의 삶이란 한없이 불쌍하다는 인식으로써의 대자비를 경험하게 된다. 이 대자비는 이후 수행의 불 쏘시게 역할을 하며 수행할 게 없어지면서 대자비에 어색하게 결부되어 있었던 불쌍함이란 감정도 점차 줄어든다.

오늘날 마지막 산업혁명인 4차산업혁명과 함께 펼쳐지는 현대에 걸맞는 것으로 평가 받는 대숭의 화엄적 세계관에서 불쌍한 중생 따위의 인식은 거의 없다.

근현대적 자아가 발동하지 않았으며 그 때문에 비교적 풍요롭지 못했던 중세 이전엔 불쌍함의 책임이 상호간의 교호적 관계에 넓게 걸쳐져 있었다. 이 시기에 불쌍할 일들은 많았다. 인성이 계발됨에 따라 많은 나라에서 더 이상 경제개발이 힘든 전제왕권제도와 귀족제도는 폐기되었다. 풍요로운 현대사회에서 못배우거나 기댈 곳이 없거나 가난하거나 권력이 없거나 신체가 건강하지 못하거나 불구이거나 모든 것은 결국 자신의 책임인 것이 드러났다. 때문에 인간관계에서 불쌍할 일은 대폭 줄어 들었다.

인간은 스스로를 포함해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으며 불쌍할 것도 성스럽지도 않다는 사실은 이제 웬만한 문학이나 자기개발서들도 다루고 있다.

중세적 구휼이 의미 없어진 현대사회에서 공공과 관련된 일이나 비수익과 관련된 일을 하게 되면 알게 되는 것이 있는데, 타인의 존재론적 불쌍함을 자신이 대변한다고 하는 마음을 행동으로 까지 이어지게 하거나, 특히 어떤 언어가 결부된 사상의 차원으로 까지 끌어 올리는 인간 치고 사기꾼 아닌 인간은 없다는 사실이다.

80년대 류시화가 우리나라에도 소개해 붐을 일으켰던 라즈니쉬가 힌두교 스타일의 사이비 종교가였음이 최근 Netflix 다큐멘터리로 소개되고 있기도 하지만, 세상에는 불쌍함을 전시하고 그걸로 명성을 얻는 테레사 같은 공산사회주의- 카톨릭 라인의 희한한 가학적 취미를 가진 인간들이 의외로 많다. 붇다가 금강경 전편을 걸쳐 귀에 딱지가 앉을 만큼 누누히 얘기했지만 종교가 어떤 성스러움을 판매한다면 그 순간 사기가 된다.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여라. 속지마라.

불쌍함의 정서를 즐기는 동시에 자신은 선하다고 여기며 그것을 인권변호사 같은 생활의 수단으로 까지 삼을 수 있다고 착각하는 인간들은 공산주의자에 대해, 나아가 김정은 같은 독재자도 인간이어서 어떤 절대적으로 고정된 존재론적 함량의 불쌍함을 가져야 한다고 여기는 경향을 보인다.

김씨 일가는 한국전쟁을 일으켰으며 북한 주민 수백만을 학살했고 국군 포로 수만명을 탄광에 가두고 강제 노역을 시켰다.

문명 발전에 뒤쳐지는 김정은과 공산주의, 사회주의를 빨리 망하도록 도와주는 게 그 스스로를 위해서나 인류전체를 위해서나 좋은 일이고 따뜻한 포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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