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라운 환각이 시작되고 하늘로 치솟아 오른 반가사유상을 나꿔채는 슬픈눈이 남순과 대결하며 영화는 오프닝 크레딧을 향해 달려간다.

모든 영화는 영화라는 추상에 대한 명상이다. 또한 모든 영화는 영화를 만들고 감상하고 기억하고 따라하는 우리의 행동에 대한 질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현대의 영화는 종교다. 어떤이는 믿고 따르기를 원하며 어떤이는 질문하며 또 어떤이는 그 모든 걸 벗어나 즐긴다.

‘형사’는 영화에 대한 질문이며 그 질문을 즐기는 영화다. 비할데 없이 철학적이면서도 그걸 들려주는 감독의 목소리는 영화자체가 그려내는 장터의 육자배기 가락처럼 질펀하다. 우린 모두 삶이 꿈이고 영화도 꿈인걸 아는 이 시대의 위대한 거리 철학자들이지 않은가? 당신도 나도, 그러니 즐기자고 한다.

이야기 꾼의 흥미진지한 야담은 과부의 엉덩이에서 멈춘다. 그리고 누군가 집중이 안된다(집중했냐?)고 외친다. 우린 다 알고 있다. 내러티브가 뭐고 드라마는 어떠해야 하는지. 형사는 그걸 메타적으로 다룬다.

송영창과 강동원은 칼싸움을 하며 ‘네 이름은 뭐였지?” “그게 생각이 나지 않는다”는 극적인 대사를 몇번이고 뱉지만 실제로 슬픈눈의 이름은 중요하지 않고 관객이 알아봐야 별 소용도 없다. 그는 슬픈눈일 뿐이다. 움베르토 에코가 ‘소설속의 독자’에서 알퐁소 알레의 ‘성전 기사단’을 예로 들며 지적한 대로 관객은 ‘장미’에는 집중하지 않고 장미의 ‘이름’에 집중하는 어처구니 없는 일을 벌인다. 이 시대의 어떤 관객들은 본질에는 집중하지 않고 드라마의 구조와 전략에 따라가고 있다. 그런 허위는 우리 삶의 대부분을 채우는 일이기도 하다.

삶의 환상과 이미지 너머에 있는 어떤 것. 그것은 중력에 대항에 똑바로 서있으려 하는 삶이라는 힘의 형상화 = 춤이고 무예이며 폭발하는 삶의 감정을 온몸으로 쏟아내며 울고 웃는 남순이다. ‘형사’는 철학적으로 극도로 어려운 척 하는 영화다. 남순과 슬픈눈은 돌담길아래서 쉽게 지워지지 않을 안타까운 꿈을 꾸듯 환상인지 기억인지 실제인지 모를 칼싸움을 벌인다. 삶과 환상 그리고 영화 자체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형사’는 이명세의 첫 작품인 ‘개그맨’의 변주다.

답글 쓰기

This site uses Akismet to reduce spam. Learn how your comment data is process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