징후와 세기 (Syndromes and a Century)

위라세타쿨은 ‘징후와 세기’에서 굳이 응시라고 할 것도 없는 펼쳐 보여주기 방식을 통해 이 세기의 공기를 보여준다.

위라세타쿤은 희한하게도 한 장면안에 의미의 다층적 레이어를 구현해 현대 태국의 지역성이 어떻게 전 세계의 인간의 삶의 고민과 다르지 않은 보편적 징후로 나타나는지를 알게 만든다.

한쪽에선 호랑이가 튀어나올 것 같은 열대의 숲이 있고 한쪽엔 현대의 인간들이 대화를 나눈다.

양복을 입고 병원에서 일하며 키스를 나누는 이들은 후기 산업사회를 살아가는 지구촌 어디에나 발견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 이들과 함께 한장면 내에 노승과 젋은 승려가 출연하는데 이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각자의 존재에 맞서는 보통사람으로 묘사된다.

중요한 것은 그 레이어의 가운데에는 공기(Air)를 빨아들이는 환풍구의 구멍처럼 뻥 뚫린 잉여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위라세타쿨의 이 잉여가 중심을 의미하는 것으로 얘기하지는 않는 듯이 보인다. 그가 생각하기에 그걸 그렇게 생각하는 것 자체가 너무 종교적이기 때문이다.

영화의 마지막은 공원에서 약간은 외설스러울 정도로 신나는 음악에 맞춰 에어로빅(aerobic)을 하는 사람들을 보여 주는 것으로 끝나는데 이것으로 우리는 위라세타쿨의 욕망 – 산뜻하고 젊은 천재 감독-을 공유한다.

특히 한국에서 인기가 많은 이유는 적어도 한국이 위라세타쿤을 이해할만한 문화적 공감의 영역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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