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학 – 유년기의 끝

‘천년학’은 조재현이 연기한 동호가 기억 속으로 들어가면서부터 스크린을 옆으로 기울이면 노란색 물감의 입자가 쏟아져 내릴 듯한 진한 색채, 그 위로 판소리 가락과 양방언의 크로스 오버 선율이 뒤섞인 말할 수 없이 아름다운 풍경을 펼쳐 놓는다.

‘천년학’과 같이 시작하고 채 5분이 지나기도 전에 당장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박수를 보내고 싶은 영화가 세상에는 존재한다. 중경삼림, 퐁네프의 연인들, 나쁜 피와 같은 영화는 빛과 소리와 내러티브를 뒤범벅시켜 피곤한 일상의 감각을 우롱하며 우리를 무중력으로 이끌어 내는 고양된 지적 구성물인 예술의 존엄을 증거하는 그런 영화들이다. 그것은 어린 사랑의 예술적 변용이고 ‘춘향전’을 통해 우리가 맛보았던 세계다. 임권택 감독은 이 젊음의 아름다움을 ‘천년학’의 앞부분에서만 잠깐 보여준다.

영화는 중반을 넘어 과거에서 현재의 시점으로 옮겨오며 풍경과 색채가 점차 빛을 잃고 시원을 잃고 헤메이는 현대 산업문명의 예술가의 삶의 궤적을 보여준다. 여기까지가 ‘서편제’의 이야기다.

동호는 득도한 송화를 담아둘 공간을 마련하지만 송화는 결국 그것마저 거부하고 예술을 넘어 비현시적 영역으로 걸어들어가 소멸한다. 동호가 애써 부정한 속세의 사랑인 아내는 신산한 삶이 만든 예술인 광기에 사로 잡힌다. 동호는 아내의 병수발을 하며 송화를 위해 마련한 집을 잃게 된다. 마지막 장면에서 결국 욕망의 대상인 송화를 실제로 만나지 못한 동호는 송화의 환상과 어율려 가락을 뽑아낸다. 임권택 감독은 이 환상을 이용해 ‘서편제’의 한과는 다른 겹의 이야기를 덧씌워 놓는다.

동호는 송화가 먼저 간 세계를 이해하고 따라가면서 그것을 현실에 그려내는 작업을 통해 비가시적 영역이 가시적영역과 합쳐지는 지점에서 예술의 새로운 장을 펼쳐보인다. 그것은 자유롭고 열린 세계, 천년의 학이 날개짓하는 전혀 새로운 세계다. 동호가 맞이한 ‘유년기의 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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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승은은 자신의 그래피컬한 외모가 가진 매체적 의미를 스스로 장악하면서 영화의 메세지를 잘 이해해 연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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