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극 (The Promise)

무극은 바라보는 시각에 따라 대단히 실망스럽게 느껴질 수 있는 작품이다.

모든 사회적, 철학적 논의를 뒤로하고 엔터테인먼트의 측면으로만 봤을 때 무극의 비쥬얼과 음악은 이미 장이모우가 영웅에서 했던 것을 따라한 정도를 뛰어넘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보이지 않는 아시아적 상상력을 영상화하는 데 있어서는 어떨까? 상상속에서 대결을 펼친다는 영웅의 빗속 대결씬, 부드러움이 강한 것을 이긴다는 언어를 영상으로 보여주는 와호장룡의 대나무 위에서의 대결씬, 그것 보다 더한 것이 무극에는 있는가? 무극에서 손쉽게 표면적으로 드러나지 않는, 보이지 않는 그것은 영화의 전편을 통해 드러나는 아시아적 사상으로서의 생명력이다.

사회라는 유기체의 생명현상 그 에너지의 근원은 예측하기 어려운 문화적 배경에 의존한다. 그것은 한 사회의 시스템을 해석한 그대로를 다른 사회에 적용해 설명할 수 없는 사례 독립성을 지닌다. 한국이 민주화를 통해 얻은 에너지가 중국에서 그대로 재현될 것이라 보기는 어렵다.

무극을 보며 느낀 것은 첸카이거가 기대고 있는 관객으로서의 중국인민(?)은 이미 다른 위치에 가 있거나 어떤 종류의 소박한 전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첸카이거 혼자의 지나친 예술가적 전망일 지도 모르겠지만 첸카이거의 심중으로 걸어들어가 그 생명력에 대한 소박한 희망을 함께 호흡해 보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은 아니다. 그런 행위에 대해 한국이 생산한 사회 정치적 견해를 필터로 삼는 것은 흥미있는 시도이지만 창발적인 어떤 체계는 이전의 방법이 아닌 그 스스로 언급하고 해석해야만하는 숙명을 가지고 있다. 그런 것을 받아 들이는 수밖에 없다. 매력 가득한 장동건이 이 영화에서 창발적 생명을 체화해 연기해 내고 있다.

이 영화를 보는 동아시아인이라면 자연스레 한중일 삼국의 역사를 떠올리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다. 마지막엔 장동건이 결국 여자를 차지하게 되기 때문에 첸카이거 마저도 한류에 빠진 게 아닐까 하는 혐의를 지울 수 없게 된다.

중국관객들이 보면서 웃었다는게 꼭 발음 때문만은 아니리라. 첸카이거 같은 중국의 거장이 장동건의 순수한 눈빛에 빠졌다고 한다. 아마도 그걸 바라보는 중국 관객들은 낮뜨거웠을 것이다. 한국관객인 나로서도 그런 첸카이거의 심정을 생각하니 닭살스러운 면이 없지 않다.

무극이란 제목의 뜻은 동아시아 사람이라면 다 아는 도교에서 말하는 세계의 본질인 그 무극(극화되기 이전의 본질적 질료의 상태)이다. 감독이 말하고자 하는 건 정적인 본질의 상태, 운명론적인 세계관을 넘어서서 우리나라의 생명사상과 같은 생명의 에너지의 발현이라는 희망의 세계관이 동양의 정신이라 말하고 있고 그런 철학적 진부함과 남사스런 천진함에도 불구하고 노장의 넉넉한 인심이 기분좋게 느껴진다.

운명의 여신인 만신이 나온는 장면의 판타스틱하기 비할데 없는 비주얼, 시종일관 시적인 영상은 눈을 뗄 수 없게 만들며 동양적인 관념의 미학을 잘 보여준다. 영화는 왕의 시해를 환상으로 보여주는 장면에서 경극과 세익스피어 희곡의 느낌을 뒤섞는 둥 다양한 영화적 테크닉을 보여준다. 대장군역을 한 사다나 히로유키라는 배우가 이런 연극적인 연기를 잘 소화해냈다.

패왕별희가 보여준대로 첸카이거는 유별난 정통파 감독이다. 그와 비슷한 컷 연결 방법으로 순진무구하고 약간은 유치한 시적인 영상을 쓰는 감독이 있다. 피터 잭슨이다. 무극에서 많은 사람들이 말하는 쿤룬이 소보다 빨리 달리는 비주얼의 어색함은 상징성 때문에 의도적인 과장으로 처리했다고 믿고 싶어진다. 판타지와 현실성과의 관계에 대해 최근 피터 잭슨은 판타지는 반드시 현실에 뿌리를 둬야 한다고 공언했고 킹콩에서 그것을 제대로 보여 줬다. 어떤 방식이 더 우월하다고 하기는 어렵다. 각자가 다루는 관념의 세계가 다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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